불멸의 것에 대한 충실성으로서의 윤리
진보평론 제11호
문성원(부산대 교수/철학)
* 알랭 바디우, ꡔ윤리학ꡕ, 이종영 옮김, 동문선
또 한 사람의 프랑스 철학자?
이 글을 부탁 받기 전, 알랭 바디우의 ꡔ윤리학ꡕ 번역본이 막 출간되었을 때, 내가 그 책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더니, 어떤 한 선생님이 농담조로 이렇게 말한 것이 기억난다.
알랭 바디우? 이건 또 누구야. 이제 더 이상의 프랑스 철학자는 필요 없어. 지금 있는 사람들만으로도 골치 아프다구...
아마 프랑스 철학 유행의 끝물을 타고 또 하나의 실속 없는 ‘담론’이 수입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섰던 모양이다.
그러나 사실 바디우가 우리에게 소개된 것은 벌써 몇 년 전이다. 이번에 ꡔ윤리학ꡕ을 번역한 이종영 선생이 이미 1995년에 ꡔ철학을 위한 선언ꡕ이라는 바디우의 책을 백의출판사를 통해 내놓은 적이 있다. ꡔ윤리학ꡕ과 마찬가지로 적은 분량의 책자이지만, 자세한 역주가 돋보이는 흥미로운 번역서였다. 하지만 이종영 선생 말대로 프랑스 철학을 우리에게 매개해 주는 미국에서 인기가 없었던 탓인지, 그 동안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리고 작년 6월에 바디우의 ꡔ들뢰즈--존재의 함성ꡕ(박정태 옮김, 이학사)이 소개되었다. 이 책은 들뢰즈의 성가(聲價)에 힘입어 앞서의 경우(ꡔ철학을 위한 선언ꡕ)보다는 반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책에는 옮긴이의 성의 있는 주석과 함께, 아직 번역되지 않은 바디우의 주저인 ꡔ존재와 사건ꡕ에 대한 친절한 해설이 붙어 있어, 바디우 철학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이제 여기에 ꡔ윤리학ꡕ 번역이 더해짐으로써 이제 우리 사회에도 바디우를 논의할 수 있을 만한 발판은 마련된 셈이다. 어쩌면 골치 아픈 또 한 사람의 프랑스 철학자가 등장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이 점에 대해 선뜻 고개가 끄떡여지지 않는 것은, 바디우 철학의 기조가 현재 우리가 익숙해 있는 프랑스 철학의 분위기와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바디우는 흔히 현대의 플라톤주의자로 불린다. 무엇보다도, 영원성과 ‘불멸의 것’에 대한 추구를 놓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영원한 진리에 대한 회의, 나아가 그러한 진리 주장에 대한 해체 논의가 득세해 있는 풍토에서는 이런 관점이 힘을 발휘하기 어렵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바디우가 고리타분한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비록 그가 요즘 인플레된 ‘차이의 담론’을 공격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바디우가 내세우는 것은 닫혀 있지 않은 ‘여럿’ 이다. ‘하나의’ 영원한 진리를 주장하지 않을뿐더러, 되려 들뢰즈 같은 이가 잠재성 따위를 앞세워 사실상 하나의 원리를 고집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바디우가 볼 때 이 하나는 본래의 존재 질서와 어긋나는 허구에 불과한데, 왜냐 하면 그러한 하나 속에는 자신을 넘어서는 다수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이렇게 다수의 존재론을 내세우는 기초로 칸토어(G. Cantor)의 집합론을 끌어들인다.*주) 여기서 초점은 하나의 전체로 봉합될 수 없는 여럿의 질서를 제시하는 데 있다. ‘공백’이나 ‘사건’ 같은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도 이런 점과 관련된다.
*주){{ 여기에 대해서는 ꡔ들뢰즈--존재의 함성ꡕ에 부록으로 실린 ‘ꡔ존재와 사건ꡕ 용어사전’ 및 옮긴이의 ‘알랭 바디우의 ꡔ존재와 사건ꡕ 소개’를 참고하라. }}
바디우가 수학을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그의 사상에 접근하는 데 적지 않은 장애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처럼 수학에 큰 비중을 둔다는 점 자체가 보편성에 대한 그의 관심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보편적인 여럿, 개방되어 있는 불멸의 다수에 대한 지향--언뜻 보기에 이것은 매우 낯설고 이상한 조합처럼 여겨질 수 있겠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서구의 ‘모더니티’ 비판에서 주된 표적이 된 전체성을 피함과 동시에, ‘포스트-모던’이 안고 있는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 모색의 한 가닥이 이런 방향으로 끌려가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일단 이 같은 작업의 의의를 인정한다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사상적 유행을 다소 거슬러서라도 바디우의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있는 셈이다. 특히 이번에 번역된 ꡔ윤리학ꡕ은 바디우의 사상적 지향이 현실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가름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다.
기존의 윤리에 대한 비판
이 책은 제목부터 좀 부적절해 보인다. “윤리학”이라는 표제로 우리는 딱딱한 개설서나 강의 교재쯤을 떠올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정형화된 틀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여기에서 바디우 자신의 독창적인 논의를 벗어난 내용을, 이를테면 다른 윤리학 이론에 대한 평이한 소개나 설명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기존의 학설이나 입장은 비판의 대상으로서만 언급될 뿐이다. 그러면서도 제목이 “윤리학”이다.*주) 부적절하다고 했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자못 부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주){{ 하긴 이 제목을 바디우가 고른 것은 아닐 것이다. 책의 원본은 Hatier 출판사에서 기획된 시리즈물의 하나로 1993년에 출판되었는데, 이 시리즈물로는 ‘시간’, ‘신체’, ‘폭력’, ‘행복’, ‘시민’ 따위의 제목을 단 소책자들이 나와 있다. 대체로 필자들은 꽤 이름 있는 사람들이다. 원제가 L'éthique니까 ‘윤리’라고 번역했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또 이 책에는 조그맣긴 하지만 “악에 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사실 바디우는 기존의 윤리나 윤리학이라는 명칭이 갖는 함의에 전혀 호의적이 아니다. 오히려 ‘윤리’라는 이름이 떠벌려지고 있는 사태에 매우 비판적이며, 이렇게 통용되고 있는 의미들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윤리’에 부여하고자 한다. 그래서 바디우의 ꡔ윤리학ꡕ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기존의 윤리를 비판하는 부분(1장에서 3장까지)과, 자기 나름의 윤리, 이른바 ‘진리들의 윤리’를 내세우는 부분(4장에서 5장까지)으로.
우선 앞부분부터 살펴보자. 특히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윤리’가 주요한 논의거리로 부각된 작금의 사태를 규정하는 대목이다. 오늘날 논의되고 있는 윤리는 “모든 프로젝트의 부재, 모든 해방적 정치와 모든 진정하게 집합적인 명분의 부재를 승인하는 것”(51쪽)이며, “선을 이름짓고 열망하는 것에의 무능력을 뜻한다”(41쪽)는 식의 표현이 나온다. 안타깝지만 수긍할 수밖에 없는 지적이지 싶다. 아닌 게 아니라, 예로부터 윤리가 주된 관심사가 되었던 때는, 매우 불만스러운 사회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투쟁의 목표와 건설의 목표를 세울 수 없었던 때이지 않았던가. 그리고 오늘날의 상황 역시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가.
보다 구체적으로 바디우는 ‘인권’을 내세우는 윤리나 ‘차이’를 내세우는 윤리, 또 이른바 ‘생명’과 관계된 윤리 등 근래에 관심을 모은 모든 윤리적 담론들을 차례로 공박한다. 그 각각의 이유를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인권의 윤리’는 두터운 보수성을 지닌다. 혁명적 상황과 그 상황의 개별성을 사유하지 못하게 하며, 그 개별적 상황에 충실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인권의 윤리는 폭력이나 차별 같은 직관적인 악을 설정하고 인권을 거기에 대비시키지만, 실제로는 극단적인 불안정과 야만적인 경쟁, ‘민족적’ 폭력의 증가를 세계 속에 방치한다. 인권의 윤리는 사실상 이 같은 서구인 중심의 허구적이고 비정합적인 일반화에 불과하다.
요즘 상당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차이의 윤리’라고 해서 사정이 나은 것은 아니다. 여기서 존중받는 차이란 실상 ‘나와 같은 부류에 속하는 한에서의’ 차이, 즉 정복하는 서양인의 기준에서 허용할 수 있는 차이이기 때문이다. “나처럼 되어라. 그러면 너의 차이를 존중하겠다.”(34쪽)가 그 모토인 셈이다. 최근 부시의 아메리카가 보여 주듯이, “자유의 적에게 자유란 없다.”(같은 곳)는 식이다. 그러므로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러한 차이가 아니라 유일한 개별자들로서의 동등성이다.
한편, ‘생명 윤리’는 인간을 행복(쾌락과 고통)이나 삶의 품위 따위에 의해 규정하는 것으로, 쾌락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성격을 지닌다. 쾌락주의와 허무주의는 상통한다. 이것은 ‘행복하게 죽는다’나 ‘잘 낳는다’를 결정하고자 하는, 생명에 대한 서양적 정복의 사고방식과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개별적인 삶의 상황에 대한 충실성을 위협한다.
역자인 이종영 선생이 지적하듯이, 이런 논의들은 일정한 맥락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섣부르게 바디우를 쫓아 인권의 윤리나 차이의 윤리를 전면 폐기하려 들 필요는 없다. 하지만 바디우의 신랄한 논조를 듣고 난 다음에는, 오늘날의 대표적인 윤리 담론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바디우가 이런 비판들을 통해 강조하는 것은 개별적인 상황과 그 상황에서 벌어지는 과정에 대한 충실성이다. 앞에서 말했던 ‘여럿’이나 ‘다수’ 또는 ‘다양’이 존재하는 것은 이런 개별적인 상황에서이다.*주) 바디우에서는 이런 다양과 개별성이 상대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개별적 상황에서부터 불멸의 것이 나타난다. 그래서 바디우는 여기에 관계하는 인간을 ‘불사의 개별성’을 지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 ‘여럿’, ‘다수’, ‘다양’은 ‘mutiple'의 번역이고, ‘개별성’은 ‘singularité’(영 singularity)의 번역이다. ‘singularité’는 ‘특이성’이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많지만, 이 책의 맥락에서는 어감상으로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바디우가 사용하는 ‘singularité’의 ‘독특한’ 의미에 대해서는 앞서 소개한 「ꡔ존재와 사건ꡕ 용어 사전」의 ‘특이성’ 항을 참조하라.}}
이런 주장의 의도가 언뜻 납득되지 않는다면, 특정한 개별적 상황에 대한 태도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가령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들어보자. 우리는 이 상황을 ‘인권’ 윤리를 통해 평가하거나 ‘차이’ 담론을 통해 재단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곳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논의하고 계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의나 평가들은 자칫 자신들의 이해 관심이 숨겨진 치장된 떠벌림이 되기 쉽다. 반면에 바디우가 볼 때 중요한 것은 이 상황의 개별적인 과정에 충실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아무나 그 상황에 직접 뛰어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일반론을 들이대어 그 사태를 완전히 규정하려 할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의 개별성을 정치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진정한 보편성은 여기에서 비롯할 수 있다.
바디우가 68년 혁명 무렵 꽤 전투적인 마오주의자의 면모를 지녔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혹 이런 식의 발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 그에게는 단순히 전체성에 대한 저항이나 다양함에 대한 인정 따위로는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 말하자면 어떤 ‘불멸의 것’에 대한 열망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지향이 다양의 상대주의를 넘어서도록, 그래서 이른바 ‘진리들의 윤리학’을 구축하도록 그를 몰고 간 것은 아닐까.
진리들의 윤리학
바디우의 사상에서 윤리학이 중심은 아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그 이론적 중심은 다수 또는 다양의 존재론이고, 윤리에 대한 관점과 이론은 여기에서 파생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ꡔ윤리학ꡕ에서도 그의 존재론에 대한 약간의 설명은 불가피하다.
바디우는 하나가 아닌 다양을 내세우는데, 그러한 한 이 다양은 하나의 전체로 닫혀 있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즉 그것은 새로움을 낳을 수 있는 개방된 것이어야 한다. 이런 새로움의 발생을 바디우는 ‘사건’이라는 개념을 통해 표현한다.*주) 사건은 기존의 상황이나 제도화된 지식과는 ‘다른 것’을 도래시키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 방식을 결정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54쪽)
*주){{ 이 ‘사건’(événement)이라는 개념은 곧바로 하이데거의 ‘사건’(Ereignis) 개념을 연상시킨다. 언젠가 나는 바디우 철학에서 이 사건 개념이 갖는 비중을 생각하고 크게 보면 결국 바디우도 하이데거의 아류가 아니냐는 좀 지나친(!) 발언을 했다가, 프랑스에서 공부한 분들로부터 약간의 반발을 산 적이 있다.}}
바디우에 따르면 이런 사건은 학문에서, 정치에서, 예술에서, 사랑에서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면, 갈릴레이의 물리학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등장, 프랑스 대혁명과 중국 문화대혁명의 도래, 하이든의 고전 음악과 쇤베르크 12음계법의 창조, 엘로이즈와 아벨라르의 만남이나 너와 나의 개인적인 열정 등이 사건에 해당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단 사건이 발생하면, 그 상황에 충실하는 한에서, 우리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사건은 이전에 볼 수 없던 새로운 ‘잉여’를 부가하는데, 바로 이 잉여의 관점에서 상황에 관계하는 것이 ‘충실성’(fidélité)이다. 즉, 충실성이란 사건에 따라 상황을 사고하고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바디우는 진리가 이 ‘충실성’의 과정에서 생겨난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사건적 상황 속에서 충실성이 생산하는 것이 진리이다. 또 ‘주체’ 역시 이러한 과정으로부터 생겨난다. 바디우는 “충실성의 지지자, 즉 진리 과정의 지지자를 ‘주체’라고 부른다.”(56쪽) 이렇게 ‘진리’와 ‘주체’는 새로운 과정을 통해, 사건에 대한 충실성을 통해 발생하는 것이므로, 이전과 일종의 ‘단절’을 이룬다. 이를테면, 아인슈타인 이전의 지식으로 그 이후의 진리를 파악할 수 없고, 프랑스 혁명 이전의 상황을 바탕으로 그 혁명에 의해 생겨난 주체를 포착할 수 없다.
그런데, 바디우에 의하면, 윤리는 바로 이런 사건과 진리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와 관계가 있다. 간단히 말해, 사건에 대한 충실성을 지키는 것, 즉 진리 과정에 대한 충실성이 곧 ‘선’이고, 이런 일관된 충실성으로서의 선을 고수하고자 하는 윤리가 바로 ‘진리의 윤리’이다.*주) 또 이런 진리 과정에 대한 참여야말로 우리가 불멸의 것에 관여하는 방식이라면, 이 진리의 윤리는 곧 불멸의 것에 대한 충실성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주){{ 여기서 진리는 하나만 존재하는 것, 완결된 것이 아니므로, ‘진리들의 윤리’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
그러나 이 때 일관된 충실성을 유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건에서 부가되는 잉여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고, 따라서 진리 과정은 “알려진 것을 알려지지 않은 것과 결합시키는”(61쪽) 매번 새로운 과정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성과 동물적인 이해 관심이 이 일관성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충실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관성과 이해(利害)의 유혹을 물리치고 기존의 존재를 넘어서기를 계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들의 윤리학’은 “충실성에의 충실성이라는 일관성의 원리” 또는 “‘계속하시오!’라는 준칙”(83쪽)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바디우가 말하는 윤리는 어떤 고정된 질서나 이상적 상태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는 여기서 현 상황의 자기 초월을 끊임없이 추동하고자 하는 지향을 읽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바디우는 68세대의 혁명적 자세를 아직 그 이론 속에 담아내고 있다고 보인다. 그런 탓인지 바디우의 ꡔ윤리학ꡕ을 읽으면, 오늘날에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강렬한 열정의 편린을 느낄 수 있다. ‘불사의 존재’, ‘사건에 대한 충실성’ 따위의 어휘부터가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지 않는가. 완결되지 않는 ‘진리의 과정’에 모든 것을 걸고 뛰어들 수 있는 투사의 윤리, ‘단절’을 용기 있게 받아들이고 관성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혁명의 윤리....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 같은 입장이 빠지기 쉬운 위험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문화대혁명에 대한 열정이 낳은 폐해를 이러한 관점에서는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진리’에 대한 열망이나 ‘사건’에 대한 충실성이 전체주의나 테러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에 대해서는 또 무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가까운 예로, 9.11 테러를 일으킨 아랍인들의 ‘충실성’에 대해서 바디우 같으면 어떻게 얘기할 것인가?
테러와 악
9.11 사태에 대한 미국 행정부의 오만하고 전제적인 대응 방식 때문에, 테러 자체에 대한 윤리적 논의는 뒷전으로 밀려 버린 느낌이 있다. ‘악에 대한 선의 전쟁’을 선언하는 부시의 태도에는 이미 불길한 징후가 가득 차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오늘의 세계는 아직도 악의 세력과 선의 세력이라는 이분법을 허용하고 있다.
바디우는 물론 이런 식의 관점을 정면에서 거부한다. 악의 세력을 규정할 수 있는 ‘근본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나치조차도 근본적인 악이나 절대적인 악이라는 견지에서 재단될 수 없다. 그러한 태도는 악이 발생한 개별적인 상황을 파고들지 못하는, 아니 파고들고자 하지 않는 ‘종교적인’ 태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악은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가?
바디우의 견지에 따르면, 악은 선에 대한 추구가 빗나가는 데서 비롯한다고 할 수 있다. 선의 추구는 진리 과정과 결부되므로 결국 악은 진리 과정의 잘못된 양상에서 생겨난다. 진리와 선이 없으면 악도 없다는 얘기다. 동물적인 약탈 행위는 선악의 개념으로 논의할 차원 이전의 것이다. 정말 문제가 되는 악은 선과 맞닿을 수 있는 “진리들의 이면 또는 어두운 면”(108쪽)이다.
따라서 바디우라면 아마 9.11 테러 역시 나름의 선을 추구하는 진리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실제로 오사마 빈 라덴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그것을 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은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지는 강렬하고 일관된 ‘충실성’을 동반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바디우에게도 테러는 ‘악’이다. 테러는 진리가 아니라 진리의 모사, 즉 ‘시뮐라크르’에서 나타나는 양상이다. 이 시뮐라크르는 사건과 진리의 외양을 빌리지만, 실제로는 보편성과 영원성이 아니라 특수한 실체에 매달린다. 예컨대, 나치는 ‘혁명’이라는 불멸의 것에 호소하는 척하면서도 실상은 독일인이라는 닫혀진 특수성을 내세웠다. 그 때문에 이 특수한 실체를 부각시키기 위한 적으로 유대인이라는 절멸 가능한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진리의 과정은 인간에게서 불사의 존재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을 보며, 그래서 이러한 인격 자체를 투쟁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반면에 시뮐라크르의 경우에는 다른 인간 집단을 자신이 내세우는 특수한 실체를 위해 없어져야 할 존재로 설정한다. 이 때문에 시뮐라크르에 대한 ‘충실성’은 전쟁과 학살, 테러로 나타난다.
이렇듯 테러는 영원성과 보편성에 관여하지 못하는 ‘가짜’ 선의 양상, 즉 ‘가짜’ 진리에 대한 충실성이 빚어내는 형상이다. 이러한 가짜의 모습은 정치적인 면에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특정한 성적 열정들은 사랑의 사건에 대한 시뮐라크르이다. 이것들은 사랑의 이름 아래에서 테러와 폭력을 행한다. 또 과학의 사건에 대한 시뮐라크르들도 있다. 과학의 이름 아래 대중에게 횡포를 부리는 몽매주의적 선전들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바디우의 ‘테러’ 규정이 9.11 사태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바디우의 말대로, 그 상황의 ‘개별성’에 대한 분석이 있어야 하는 까닭이다. 또 쌍둥이 빌딩을 폭파한 일 자체야 분명 ‘테러’라 하더라도, 일단 그러한 테러가 일어난 상황은 우리에게 새로운 대응을 요구하는 ‘사건적’ 상황의 시발일 수 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고려를 떠나서라도 테러와 악에 대한 바디우의 생각은 충분히 숙고해 볼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적어도 바디우는 선악에 대한 치졸한 양분법과 테러에 대한 찬양이나 열광이라는 두 가지 위험을 모두 넘어설 수 있는 일관된 사고방식의 한 예를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바디우에 따르면 악은 ‘테러’말고도 ‘배반’과 ‘파국’(désastre)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배반이란 곧 진리 과정에 대한 충실성을 포기하는 것을 일컬으며, 파국은 진리가 개방성을 잃어버리고 전능한 것처럼 취급되는 사태를 말한다. 배반은 진리 과정의 위기에서 우리를 유혹한다. 흔히 말하는 변절이 배반의 악인 셈이다. 또 파국은 모든 것을 장악하려는 전체주의적 악의 형상이다. 문화대혁명에서 홍위병이 보여 주었던 오류 따위가 ‘파국’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바디우에서 모든 악은 진리 과정과 관계된다. 진리는 영원성과 보편성에 관계하고 충실성을 요구하지만, 결코 절대화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명명될 수 없는 ‘공백’이 남아있는 것이 존재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바디우를 위하여
지금까지, 서평이라기보다는 한 권의 좋은 책을 소개한다는 기분으로 ꡔ윤리학ꡕ의 내용을 아주 간략하게 추려보았다. 그러나 내 나름의 이해로 이 책의 독창성과 깊이가 충분히 전달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바디우는 자크 랑시에르, 에티엔느 발리바르 등과 함께 루이 알튀세르의 대표적 제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당시의 지적․정치적 문제의식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상적으로 잘 형상화해내고 있는 철학자로 꼽힌다. 사용하는 개념들이나 어투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접근하기는 힘들지만, 그 정도의 곤란함은 현재 우리 사회의 지적 불균형을 바로잡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바로 충분히 상쇄되고도 남을 것이다.*주)
*주){{ 이런 점에서 나는 역자인 이종영 선생과 의견을 같이 한다. 한편, 바디우의 철학 체계에 대한 이종영 선생의 비판적 생각은 ꡔ철학을 위한 선언ꡕ(앞의 책)의 옮긴이 서문과 역주에 어느 정도 드러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바디우를 통해 현 상황을 헤쳐나가는 구체적인 지침이나 목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따지고 보면 바디우의 철학도 ‘우발성’에 기대는 알튀세르 말기 사상의 면모를 이어받고 있다. 장악할 수 없고 예기(豫期)할 수 없는 ‘사건’에 대한 존재론은, 못마땅한 현실을 벗어나려는 갈망이자 전체성의 지배를 경계하는 표현일 수는 있겠지만, 더 나은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에는 이르지 못한다. 바로 이러한 면 때문에, 바디우는 윤리를 ‘모든 프로젝트의 부재’를 승인하는 것이라고 폄하하면서도, 그 스스로 ꡔ윤리학ꡕ을 쓰지 않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당분간 어쩔 수 없이 ‘윤리 시대’를 살아나가야 하는 것이라면, 어떤 윤리적 자세 하에서 모색을 해 나가느냐는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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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
서용순(파리 8대학 철학과 박사과정)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철학자(?)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모든 철학은 시대의 징후이다. 플라톤의 철학이 그리스 공화정 말기의 혼란과 더불어 민주정에 대한 근원적인 불신을 드러내고,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20세기라는 역사적 시점의 지배적인 동력이었던 기술과 그 기술의 파괴적인 힘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 것은 모두 시대의 징후로 읽어 내려가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대는 어떠한가? 우리 시대는 하이데거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요컨대 수십년 이래로 우리는 사회주의를 포함한, 인간 이성으로 수립된 모든 프로젝트를 의심하고 부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등을 돌린 것으로 간주된 과학에 대한 불신이라고 볼 수 있다. 서구를, 나아가서는 세계를 지배했던 큰 흐름인 합리주의는 인간을 행복으로 인도하지 못한 채, 스스로의 수명을 다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양 철학에서 이러한 경향은 1980년대 이래로 지배적인 담론으로 자리 잡았다. 일찍이 리요따르는 건축술로서의 철학, 즉 시스템으로서의 철학의 종말을 선고하였고, 많은 철학자들이 플라톤 이래 철학에서 배제된 시학(詩學, poetique)의 문제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이른바 거대 담론은 해체되었고, 전통적인 철학의 영역이었던 진리의 문제는 더 이상 제기되지 않는다. 철학은 이제 시학을 비롯한 예술에 자신의 지위를 양도한 채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 근거를 발견하려 한다. 철학사는 부정되었고 이제는 플라톤에 의해 추방되었던 시인들이 그 자리를 점하고 있다. 이것이 현재 철학이 위치하고 있는 지점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며, 철학의 시학으로의 투항에 저항하는 한 철학자가 있다. 바로 프랑스의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1937-)이다. 그의 철학적 여정은 아주 거센 굴곡을 보여준다. 싸르트르에게 감화를 받고 있던 그의 청년 시절, 알튀세와의 만남은 그를 과학적 이론의 추종자로 만들었지만 68년 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프랑스 공산당과 68혁명의 대립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알튀세를 강하게 비판하며 그와 결별한다. 그리고는 실뱅 라자뤼스, 나타샤 미셸, 프랑수와 발메 등과 마오주의 그룹인 예난(Yenan)그룹을 결성해 프랑스 공산당에 맞서 투쟁한다. 이후 80년대에 들어 유럽에 지적 반동의 시기가 도래하자 마르크스주의를 벗어나 다른 혁명적 대안을 마련하는 시도를 행하게 되고, 그 결실은 1988년『존재와 사건』의 출간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는 수학적 존재론의 구축을 통해 철학을 복권시키고, 새로운 해방적 프로젝트를 그 존재론에 담아낸다. 오늘날 그는 흔히 포스트모던 철학의 중심지로 여겨지는 프랑스 철학의 중심을 흔드는 철학자이다. 그는 자신의 주요한 무기인 집합 이론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존재론을 구성해내고, 이를 통해 만신창이가 된 철학에 그 자리를 되돌려준다.
종말을 부정하기
우선 그의 철학을 가로지르는 큰 흐름을 살펴보자. 바디우는 모든 현대 철학의 지배적 경향인 시스템으로서의 철학의 종말이라는 페이소스에 반대한다. 그에 따르면 이른바 종말이라는 테마는 철학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없다. 거대 담론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것은 '거대담론' 만큼이나 거창한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철학은 존재할 수 있고 우리 시대에 그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 바디우의 주장이다.
물론 철학이 항상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이 근원적인 위기에 처했던 시대 역시 분명히 있었다. 철학은 항상 불연속적이었고, 철학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해왔다. 하지만 철학과 그 조건들이 가지는 관계에 놓여진 불변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진리'이다. 진리라는 테마만이 철학과 그 조건이 되는 여러 사유를 관계짓는 요소이다. 그런데, 이러한 철학의 조건들은 진리를 생산하는 절차(공정, procedure)로서만 철학의 조건이 된다. 말하자면 이 조건들은 각자의 개별적 특성에 기반하여 진리를 생산해내고, 진리를 생산해내는 한에서만 철학과 관계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진리 생산의 사유는 철학의 조건인 것이다. 이렇듯 철학은 스스로 진리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다만, 조건들이 생산한 진리를 개입(intervention)을 통해 명명(nomination)해낼 뿐이다. 바디우는 철학의 조건을 이루는 진리 산출의 유적1) 절차(공정, procedures generiques des verites)를 네 가지 정도로 분리해낸다. 정치, 과학(그 중에서도 수학), 사랑, 예술(시학(詩學))이 그것이다.
철학 - 봉합에서 공가능성으로
철학의 조건으로서의 네 가지 진리의 공정이 서로를 배제하거나 종속시키지 않고, 그 조건들이 모두 공존가능하다는 점을 사유하는 것이 바로 바디우가 정의하는 철학의 작업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네가지 공정이 모두 진리를 생산하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바디우는 이 점을 아주 중요시하여 봉합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그 동안의 철학은 이러한 공가능성(compossibilite, 여러 가지 조건이 각자의 영역에서 모두 진리를 생산하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 동안의 철학은 다른 조건들이 가지는 진리 생산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 중 하나, 혹은 일부에 대해서만 진리의 가능성을 인정한 것이다. 진리 생산의 다양한 가능 영역은 부정되고 진리는 어느 하나의 영역에 갇혀버린 것이다. 이것을 바디우는 철학의 봉합이라고 명명한다. 그는 다양한 봉합의 실례를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19세기는 철학이 과학적 실증주의에 봉합된 시기였고, 영미권의 아카데미적 철학은 아직도 이 봉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철학을 정치와 과학에 동시에 봉합시켰다. 이러한 이중의 봉합의 복잡한 구조를 스탈린은 철학, 혹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부른다. 하이데거는 기술이 되어버린 과학에 반대하여 철학을 시학에 가두어버린 것으로 간주된다. 실증주의나 마르크스주의는 이미 많은 비판을 통하여 화석화된 봉합일 뿐이고, 이제는 제도적이거나 아카데미적인 봉합이지만, 하이데거를 그 축으로 하는 시학(예술)에의 봉합은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봉합 형태이고, 전혀 검토된 적이 없는 봉합이다.
철학이 과학과 정치에 봉합되어 있을 당시, 시학은 철학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마침내 시인의 시대는 열린다. 그러나 여기서 바디우가 말하는 시학은 모든 시와 시인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 시대는 횔더린(Holderlin)에서 파울 첼란(Paul Celan)에 이르는 시기이며, 문제가 되는 것은 진정한 사유의 모습을 보여주는 시인과 시일 뿐이다. 하이데거가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시학이 행한 것은 시에 의한 존재의 문제에의 접근이었다. 시인들의 공헌은 대상의 범주를 해체함으로써 탈객관화(주지하듯이 객관화는 과학의 미덕이다)를 실현해낸 데 있다. 여기서 하이데거의 철학은 객관성(대상성, l'objectivite)의 철학에 대한 비판과 객관적 철학의 시학적 해체를 결합시켜냄으로써 엄청난 강점을 획득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수학과 시학의 이율배반을 지식과 진리의 대립, 혹은 '주체/대상'과 '존재(Etre)'의 대립으로 엮어냄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그러나 랭보, 혹은 로트레아몽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시학은 항상 수학과 사유를 공유하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다. 시인들은 수학에 대상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대상의 범주를 해체하고 첼란에 이르러 시인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그리고 철학이 완전한 탈봉합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시인의 시대가 끝남과 더불어 열리게 된다.
진리의 사건들
우리는 이제 진리가 어떻게 생산되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진리는 진리 생산의 네 가지 절차 속에서 생산된다. 그러나, 이 네 가지 절차가 항상 진리를 생산해내는 것은 아니다. 진리는 사건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요컨대 진리의 네 가지 공정은 진리의 생산이 가능한 영역일 뿐이다. 진리는 사건에 의존적이다.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는 사건의 진리인 것이고, 만일 이 네 가지 영역 속에 사건이 없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아무런 진리도 발견해낼 수 없다. 이 사건의 진리야말로 바디우 철학의 핵심이다. 우리는 각각의 절차에서 드러난 상이한 사건들을 볼 수 있다.
역사를 살펴볼 때 정치에서의 사건은 언제나 상이한 형태(18세기말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과 20세기 초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의 형태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로 나타났다. 우리 시대에 국한시켜 보자면 정치적 사건은 68년에서 80년에 이르는 역사적 시기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 예로는 프랑스의 68년 오월 혁명과 중국의 문화 혁명, 이란 혁명, 그리고 폴란드 연대 노조에 의해 주도된 노동운동을 들 수 있다. 이 사건들은 새로운 명명이 필요한 사건들이다. 폴란드의 노동 운동을 제외하면 그들 정치적 사건은 그 내용의 새로움과는 유리된 낡은 사상 체계에 의해 표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문화 혁명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하고 있었으며, 이란 혁명은 이슬람으로의 복귀, 즉 옛 것으로의 복귀라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 사건을 명명하는 철학적 개입(intervention)은 아직 완수되지 않았다. 이 정치적 사건은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지식 체계를 교란시키는 것이기에 사건이고, 진리를 생산할 수 있지만, 그것의 명명은 아직 철학의 과제로 남아있는 것이다.
칸토르에서 폴 코헨까지의 현대 집합 이론은 수학에서의 사건이다. 이 집합 이론은 식별 불가능한 다수성(multiplicite indiscernable)에 대한 개념을 수립해낸다. 이로써 집합 이론은 존재-로서의-존재(Etre-en-tant-qu'etre)에 대한 합리적 사유와 언어 사이의 문제를 해결한다. 식별 불가능한 다수성의 존재를 증명함으로써, 기존의 지식 체계를 규정하는 언어 체계를 벗어난, 즉 기존의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가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바로 진리가 이러한 존재 형태를 갖는다고 바디우는 역설한다. 진리는 지식에 구멍을 내는 것이며, 따라서 진리에 대한 지식은 있을 수 없다. 진리는 단지 생산될 뿐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유적(類的, 산출적, generique)이며, 기존 언어를 통한 지칭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진리는 항상 기존 언어에서 벗어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부분은 언어로 결정할 수 없는 부분으로서 기존의 언어에 비추어 초과분(exces)이 된다. 우리는 그것의 확실한 정체를 알 수 없다. 바디우는『존재와 사건』에서 집합 이론을 통해 이 사실을 잘 증명해내는데 이는 '방황하는 초과분'의 존재를 증명해내는 것이고 그 자체로 진리가 존재하는 방식이 된다.
시인의 시대를 통틀어 볼 때, 시에서의 사건은 파울 첼란의 작품이다. 데리다나 가다머 혹은 라꾸-라바르뜨(이들은 바디우의 철학적 대화 상대자이면서 동시에 그의 주요한 논적이다)와 달리 바디우는 첼란의 시에서 시는 그 자체로 충분치 않다는 고백을 읽어낸다. 그의 시는 봉합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시의 권위에서 자유로워진 철학을 원한다. 말하자면, 첼란은 그의 작품을 통하여 우리시대의 개념적 전유를 다른 영역과 공유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첼란의 공헌은 시를 철학이 그 시대에 행해온 사변적 기생으로부터 해방시키며, 시를 진리의 나머지 절차들과 공존하게 함으로써 시에게 자신의 자리를 돌려주는 데 있다. 이것이 첼란이 행한 시의 사건의 핵심적 내용이다.
사랑의 사건은 라깡의 저작이다. 사랑에 대한 라깡의 이론은 하나(l'Un, the One)의 지배를 파괴하고 둘(le Deux, the Two)의 문제를 사고했다는 점에서 사건이다. 라깡은 성에서의 둘을 논리적으로 연역해낸다. 이로써 남성(손상된 전체(Tout)의 벡터)과 여성(비-전체(pas-toute))은 서로 전혀 다른 둘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두 개의 성은 전혀 다른 입장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만남이라는 사랑의 사건을 통해 둘은 일자(하나, l'Un)의 법칙을 초과하는(넘어서는) 끝없고 완성될 수 없는 경험을 꾸며낸다. 이것을 바디우는 성차에 대한 진리, 사랑에 빠진 당사자들의 지식에서 벗어나 있는 진리가, 이름없는 혹은 유적인 다수성으로서 도래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사랑이란 만남이라는 사건을 통한 '둘'에 대한 진리의 생산인 것이다.
그렇게 사건을 계기로 생산되어 잠시 나타난(presenter) 진리는 지식을 통하여 사후적(事後的)으로 표상될(representer) 뿐이다. 이때 진리를 생산해 낸 각각의 절차는 스스로 그것이 진리인지 말할 수 없다. 그들은 고유한 활동에 전념할 뿐, 진리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 그 절차들은 진리를 모른다. 그 진리의 명명작업을 해내는 것, 그렇게 다른 곳에서 생산된 진리를 사유하는 것, 바로 그것이 철학의 작업이다. 예컨대, 철학은 이미 다른 지점에서 생산된 진리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 철학의 임무인 것이다. 이제 철학은 본연의 위치로 돌아갈 수 있다. 네가지 유적 절차들에서 생산된 진리를 사유하고 명명함으로써 바디우가 원하는 철학적 행동(acte philosophique)은 이제 가능해진 것이다.
주체의 이론
위의 예에서 보았듯 사건은 진리를 생산해냄으로써 지식(savoir)의 망을 교란시키고(구멍을 내는 것이다), 곧 지식 속으로 사라진다. 진리의 흔적은 그 진리에 충실한 주체(sujets fideles)를 통해서 밖에는 파악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주체는 진리의 담지자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존재가 주체인 것은 아니듯, 주체는 그 충실성을 잃고 배반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68년 오월 혁명의 많은 주체들은 그 사건이 생산해낸 진리에의 충실성을 잃고 그 진리를 배반하였고, 중국의 문화 혁명도 같은 길을 걸었다. 때로는 환영(simulacre)을 사건으로 착각하여 그 환영에 충실하기도 하는데, 파시즘의 예가 그 좋은 예이다.) 진리에 의해 호출된 그들은 진리에 충실한 주체들이다. 그 진리에 충실함으로써만 그들은 주체일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주체들은 진리의 담지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바디우의 윤리학이 드러난다.
바디우는 구조주의에 의해 부정된 주체를 다시 철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객관주의를 벗어나 비로소 주체적 정치(politique subjective)를 가능하게 한다. 구조주의에 의해 단지 구조의 담지자로만 파악되었던 인간은 바디우의 손에서 다시 주체가 된다. 물론 이 주체는 마르크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와 같은 선험적인 주체는 아니다. 자신의 이해(intert)에 의해 움직이는 인간 동물(l'animal humain, 영장류 동물로서의 인간)은 진리의 사건을 만났을 때 비로소 자신의 이해에서 벗어난 이해(intert-desinteresse)를 추구하는 주체가 되어 자신의 진리에 충실하게 된다. 이렇게 사건을 통하여 동물이었던 인간은 존재의 새로운 방식을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마침내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 새로운 존재방식을 바디우는 충실성(fidelite)이라고 부른다. 이 주체의 충실성이야말로 진리의 과정이 지속될 수 있게 하는 단 하나의 원칙이다. 진리는 사건과 동시에 나타나 지식 체계에 파열구를 만든 후 즉시 지식 속으로 사라진다. 결국 진리가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지식의 객관성이 아닌 진리가 만들어내는 주체성, 바디우에 의해 충실성으로 표현된 그 주체성의 발현을 통해서일 뿐이다. 주체의 충실성은 진리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오늘날 미디어와 정치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유포된 '인권'과 같은 세론(世論)은 결코 윤리학의 지표가 될 수 없다(우리는 이 '인권'이 미국의 주요한 공갈 협박 수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오로지 진리의 변전만이 윤리학의 재구성을 위한 기준일 것이다. 그 윤리학의 금언은 "계속하자!(continuer!)"라고 말한다. 즉 진리에 계속 충실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이른바 진리의 윤리학의 함의가 있다. 다시 말해 바디우의 윤리학은 진리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인 '주체의 충실성'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듯 바디우의 이론에서 주체는 지식의 영역인 객관성의 범주에 포섭될 수 없다. 이러한 관점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가 견지해왔던 주체에 대한 과학적-객관적 문제틀에 정면으로 대립한다. 마르크스주의는 계급이라는 객관적인 개념을 통해, 혁명적 주체성을 지녔다고 전제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보편성을 지닌 역사의 주체로 설정한다. 계급은 이로써 주체성과 객관성을 아우르는 순환적인 개념이 된다. 하지만 바디우에게 주체는 객관적인 수준으로 포섭될 수 없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파악된 인간, 대상성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은 그저 인간 동물일 뿐이고, 주체는 이 인간 동물에 '무엇'인가가 추가된(supplemente) 것이다. 그 '무엇'은 진리에 다름 아니고, 이 진리를 통하여 인간 동물은 주체가 된다. 주체는 결코 선험적으로 설정될 수 없고, 인간이 사건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 드러난 진리를 만나지 못한다면, 주체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바디우의 철학에서 직접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이다. 우리는 앞서 바디우에게 진리는 기존의 지식망을 교란시키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기존의 지식 체계는 객관성의 표현에 다름 아니라고 할 때, 진리는 객관성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다. 객관적인 것은 지식 체계일 뿐이다. 물론 진리는 오직 한 순간 빛을 발하고 지식 속으로 사라지지만, 그 진리에 충실한 주체들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진리의 사건은 주체화 과정(le processus de subjectivation)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새롭게 열리는 진리의 지평
지금까지 살펴본 바디우의 철학을 통해 우리는 그가 진리의 문제에 천착해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진리는 우리가 알고있던 진리와는 사뭇 그 모습이 다르다. 그것은 다수의 진리로서 전혀 다른 진리의 지평을 인정하는, 결코 폭압적이지 않은 열려있는 진리이다. 진리의 공가능성(compossibilite)은 전제적인 일자(一者, l'Un)의 모습을 부정하고 진리의 다수성을 인정한다. 이러한 바디우의 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복수의 진리를 서로 다른 영역에서 사고하게 하며, 잃어버렸던 주체를 새로운 방식으로 전유할 수 있게 한다. 바디우와 더불어 합리적 사유는 마침내 가능해지고, 그것이 포함하는 혁명적 사유는 마침내 펼쳐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그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철학자가 아닌, 새로운 사고의 지평을 열어 젖히는, 진리의 옹호자인 셈이다. 바디우와 더불어 서로를 인정하는 다수의 진리라는 관념이 수립되고, 진리라는 관념이 편협한 사고로 우리를 인도할 가능성은 제거된다. 마침내 열려진 지평 위에서 진리를 사고하는 일만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다.
주1) 유적(類的)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generique라는 말은 논리학적으로 비결정성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하나의 개별 원소가 '유적'일 때 우리는 그 원소가 어떠한 구분에 속하는 것인가만을 알 뿐 동일한 구분에 속해있는 다른 개별 원소와 어떻게 구분되는지는 알 수 없다. 그 개별 원소는 항상 개별적이면서 일반적인 가치를 갖는다. 진리의 서로 다른 절차들은 진리를 생산하는 동일한 구분에 속해 있지만 서로의 관계는 규정지어지지 않는다. 그 절차들은 각각의 진리를 생산하지만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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